한비자
덕과 인과 의에 대하여(20.해노.1)
덕과 인과 의에 대하여
- 한비자 제20편 해노[1]-
덕(德)이란 대내적인 것이지만 득이란 외면적인 것이다. 노자에「최상의 덕은 덕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정신이 물질에 유혹되고 흔들리지 않음을 말한다. 정신이 물질에 유혹되어도 흔들리지 않을 때에는 그 몸은 상처를 입지 않고 완전히 보지할 수 있다. 그 몸이 완전히 보지 된 상태를 덕이라 한다. 덕이란 그 몸을 완성하는 길이다. 덕은 우리가 무위하는 경우에 집성되고 무욕하여 성취되며, 무실하여 안정할 수 있으며, 동요하지 않으므로 견고한 것이다. 만일 무슨 일을 하고자 생각하고 욕심을 일으키면 덕은 안정될 수가 없다. 덕이 안정되지 못하면 완전할 수가 없다. 무엇인가 움직여 보려고 하거나 무슨 생각이 있으면, 덕은 견고할 수가 없다. 견고하지 않으면 덕은 그 공을 잃게 된다. 덕이 그 공을 잃게 되는 것은 획득하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따라서 득을 원하면 덕이 생기지 않고, 득의 움직임이 없으면 덕이 나타난다. 그래서 노자는「최상의 덕은 득이 아니다. 그리하여 덕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하지도 않고 생각지도 않으며, 그리하여 무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자기 의지가 남에게 제약되지 않는 점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술을 모르는 자는 새삼스럽게 하지 않고 생각지 않겠다는 방법으로 무를 이루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 않고 생각지 않으려는 방법으로 무를 이룩하고자 하는 자는 그 의지가 항상 무를 향하고 있기 때문에 무를 잊지 못한다. 이것은 무에 의해서 제약을 받고 있는 셈이 된다. 무란 의지가 다른 존재에 의해서 제약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무에 의해서 제약된 상태는 무가 아니다. 무를 무위라고 하는 것은 무위를 상도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무위를 상도로 하지 않으면 무위에서 제약을 받지 않으므로 무가 되는 것이다. 무가 되면 덕이 번영한다. 이것을 상덕이라 한다. 그러므로 노자는「최상의 덕은 무위이기 때문에 무엇이나 할 수 있다」라고 말한 것이다.
인(仁)이란 마음 속으로부터 기뻐하며 사람을 사랑함을 말한다. 인자(仁者)가 타인의 행복을 기뻐하며 타인의 재화(災禍)를 증오하는 것은, 그 마음의 멈출 수 없는 작용에서 비롯한 것으로서 구태여 보수를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노자는 「최상의 인은 이것을 행하여도 고의로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의(義)란 군주와 신하 상하의 질서와 부자와 귀천의 차별, 지인과 붕우의 관계, 친소와 내외의 구분을 보여준다. 신하는 군주를 적절히 섬기며, 아랫사람은 적절하게 윗사람과 관계하며, 자식은 적절하게 부친을 섬기며, 천한 자는 적절하게 귀한 자를 존경하며, 지인과 붕우는 적절하게 협력하며, 친소나 내외도 그 관계를 적절하게 취해야 한다. 의란 그 관계의 적절함을 말한다. 따라서 의란 적절히 하는 일이다. 그래서 노자는 「최상의 의는 이것을 행하는데 확실한 생각으로 한다」고 말한 것이다.
- 韓非子 第20篇 解老[1]-
德者, 內也. 得者, 外也.「上德不德」, 言其神不淫於外也. 神不淫於外, 則身全. 身全之謂得. 得者, 得身也. 凡德者, 以無爲集, 以無欲成, 以不思安, 以不用固. 爲之欲之, 則德無舍 德無舍, 則不全. 用之思之, 則不固 不固, 則無功 無功, 則生有德. 德則無德, 不德則有德. 故曰:「上德不德, 是以有德.」
所以貴無爲無思爲虛者, 謂其意無所制也. 夫無術者, 故以無爲無思爲虛也. 夫故以無爲無思爲虛者, 其意常不忘虛, 是制於爲虛也. 虛者, 謂其意所無制也. 今制於爲虛, 是不虛也. 虛者之無爲也, 不以無爲爲有常. 不以無爲爲有常, 則虛 虛, 則德盛 德盛之謂上德. 故曰:「上德無爲而無不爲也.」
仁者, 謂其中心欣然愛人也 其喜人之有福, 而惡人之有禍也 生心之所不能已也, 非求其報也. 故曰:「上仁爲之而無以爲也.」
義者, 君臣上下之事, 父子貴賤之差也, 知交朋友之接也, 親疏內外之分也. 臣事君宜, 下懷上宜, 子事父宜, 賤敬貴宜, 知交友朋之相助也宜, 親者內而疏者外宜. 義者, 謂其宜也, 宜而爲之. 故曰:「上義爲之而有以爲也.」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