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주재자의 존재는 인간의 지혜로 알 수 없다 (잡편:25.칙양,12)
주재자의 존재는 인간의 지혜로 알 수 없다
- 장자(잡편) 제25편 칙양[12]-
소지가 말했다.
“계진처럼 자연의 주재자가 없다는 설과 첩자처럼 주재자가 있다는 설이 있는데, 두 사람의 설 중에 어느 것이 진실에 합치되고 어느 것이 진리에 들어맞는 것입니까?”
대공조가 말했다.
“닭이 울고 개가 짖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일이다. 그러나 비록 위대한 지혜를 지녔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떻게 그렇게 되고 있는가를 말로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그것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마음으로 추리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분석해 나가면 비길 데 없이 정미한 경지에 이르게 되고, 크게는 한정지을 수 없는 정도에 이르게 된다. 그러니 주재자가 있다거나 주재자가 없다고 하는 이론은 물건의 현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어서 결국은 잘못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주재자가 있으면 작용이 실재적인 것이 되고, 주재자가 없다면 작용도 허무한 것이 된다.
따라서 이름이 있고 사실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은 현상계에 집착되어 있기 때문이며, 이름도 없고 사실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현상계를 공허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말로 표현할 수 있고 마음으로 추리할 수 있는 것이지만, 도란 말로 표현할수록 진실과는 더욱 멀어지는 것이다.
물건이 생겨나기 전에 생겨나지 못하도록 막을 수는 없는 것이며, 이미 죽어버린 것을 죽지 못하게 막을 수도 없는 것이다. 죽음과 삶은 우리로부터 멀리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 원리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주재자가 있다거나 주재자가 없다는 설은 결국 억측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다. 내가 보건대 만물의 근본은 추궁하여도 끝이 없는 것이다. 내가 추구해 보건대 만물의 종말은 오는 곳이 한정이 없는 것이다. 끝도 없고 한정도 없으니, 그것을 무로써 표현할 때 비로소 물건의 실리와 합치되게 되는 것이다. 주재자가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것은 이론의 출발점으로써 만물과 더불어 영원히 부침할 것이다. 도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도라는 이름은 가정적으로 그렇게 불리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주재자가 있고 없다는 것은 물건의 일단을 놓고서 얘기할 수 있는 일이지, 어찌 자연의 위대한 도를 놓고서 말할 수 있겠는가? 도를 말로써 충분히 나타낼 수 있다면 하루종일 말하면 도를 형용해 낼 수가 있을 것이다. 도를 말로써 표현해 낼 수 없는 것이라면 하루 종일 말을 하더라도 물건에 대한 얘기에 그칠 것이다. 도란 물건의 극치이므로 말이나 침묵으로는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말도 아니고 침묵도 아닌 경지에서 그런 도의 극치는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 莊子(雜篇) 第25篇 則陽[12]-
少知曰:「季眞之莫爲, 接子之或使, 二家之議, 孰正於其情, 孰徧於其理?」
大公調曰:「鷄鳴狗吠, 是人之所知. 雖有大知, 不能以言讀其所自化, 又不能以意測其所將爲. 斯而析之, 精至於无倫, 大至於不可圍, 或之使, 莫之爲, 未免於物, 而終以爲過. 或使則實, 莫爲則虛. 有名有實, 是物之居, 无名无實, 在物之虛. 可言可意, 言而愈疏. 未生不可忌, 已死不可徂. 死生非遠也, 理不可覩. 或之使, 莫之爲, 疑之所假. 吾觀之本, 其往无窮. 吾求之末, 其來无止. 无窮无止, 言之无也, 與物同理. 或使莫爲, 言之本也, 與物終始. 道不可有, 有不可无. 道之爲名, 所假而行. 或使莫爲, 在物一曲, 夫胡爲於大方? 言而足, 則終日言而盡道. 言而不足, 則終日言而盡物. 道物之極, 言黙不足以載. 非言非黙, 議有所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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