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외물과 융화하여 자연의 변화에 몸을 맡겨라 (외편:22.지북유,17)
외물과 융화하여 자연의 변화에 몸을 맡겨라
- 장자(외편) 제22편 지북유[17]-
안회가 공자에게 물었다.
“제가 전에 선생님으로부터 사라져가는 것을 전송하지도 말고 닥쳐오는 것을 마중하지도 말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까닭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옛날 사람들은 밖의 물건이 변화하더라도 거기에 순응하기만 했지 자기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지금 사람들은 자기 마음은 밖의 물건에 의하여 변화하면서도 밖의 물건에 동화하지는 못한다. 물건과 더불어 함께 변화하는 사람은 한결같이 자신의 마음은 변화시키지 않는 것이다. 자연에 따라 변화하기도 하고 변화하지 않기도 하는데, 언제나 자연의 변화를 따르기만 하며 반드시 자연에 대하여 지나치는 일이 없이 자기 분수를 지킨다.
희위씨는 동산을 만들고 살았고, 황제는 채소밭을 만들고 살았고, 유우씨 순임금은 궁전을 만들고 살았고, 은나라 탕임금과 주나라 무왕은 궁실을 짓고 살았다. 이처럼 후대로 올수록 노니는 범위가 좁아져서, 후세에는 군자라는 사람들이 유가와 묵가를 따라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으므로 옳고 그름을 따지며 서로를 공격하게 되었다. 그러니 하물며 지금 사람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성인은 물건을 따르므로 물건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물건을 손상시키지 않는 사람에 대하여는 물건 또한 그를 손상시킬 수 없게 된다. 오직 물건을 손상시키는 일이 없는 사람만이 자연을 따라 보내고 마중할 수가 없게 된다.
산림에서건 평원에서건 노니는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흔흔히 즐기게 하여 준다. 그러나 즐김이 끝나기도 전에 슬픔이 또 계속되게 되는 것이다. 슬픔과 즐거움이 닥치는 것은 우리로서는 막을 수가 없다. 그것들이 떠나는 것도 우리는 막을 수가 없다. 슬프다! 세상 사람들이란 바로, 밖의 물건들이 머물러 슬프고 즐겁게 해주는 여관이라 할 수 있다.
지혜로써 경험한 것들은 알지만 경험하지 못한 것은 알지 못한다. 능력의 범위 안에 있는 것은 할 수 있지만 능력 밖에 있는 것은 할 수 없다.
그래서 알지 못하는 것이 있고, 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것은 본래 사람으로써는 면할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런데 사람으로서 면할 수 없는 일을 면하려고 힘쓰고 있다는 것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지극한 이론이란 이론을 초월한 것이며, 지극한 행위란 행위를 초월한 것이다. 지혜로써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알려한다는 것은 천박한 일이다.”
- 莊子(外篇) 第22篇 知北游[17]-
顔淵問乎仲尼曰:「回嘗聞諸夫子曰:‘无有所將, 无有所迎.’ 回敢問其遊.」
仲尼曰:「古之人, 外化安不化, 安與之相靡, 必與之莫多. 豨韋氏之囿, 黃帝之圃, 有虞氏之宮, 湯武之室. 君子之人, 若儒墨者師, 故以是非相[敕+韭]也, 而況今之人乎! 聖人虛物不傷物. 不傷物者, 物亦不能傷也. 唯无所傷者, 爲能與人相將迎. 山林與! 皐壤與! 使我欣欣然而樂與! 樂未畢也, 哀又繼之. 哀樂之來, 吾不能禦, 其去弗能止. 悲夫, 世人直爲物逆旅耳! 夫知遇而不知所不遇, 能能而不能所不能. 无知无能者, 固人之所不免也. 夫務免乎人之所不免者, 豈不亦悲哉! 至言去言, 至爲去爲. 齊知之所知, 則淺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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